
평일 늦은 밤, 잠깐 보고 자려고 노트북을 켰다가 새벽 두 시가 넘도록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2008년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 '추격자'는 누적 관객 507만 명을 동원하며 그해 가장 뜨거운 화제작으로 자리를 잡았고,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각본상을 한꺼번에 가져간 작품입니다(출처: 청룡영화상 공식 홈페이지). 단순한 범죄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보고 나면 한참 불을 끄지 못하는 영화입니다.
골목 추격이 만들어낸 공포, 그리고 연출의 힘
저도 처음엔 '그냥 잘 만든 범죄물이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골목 추격 시퀀스가 시작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겨 앉아 있었습니다. 몸이 먼저 반응한 거였습니다.
나홍진 감독이 이 장면에서 사용한 핵심 기법은 핸드헬드 카메라입니다. 핸드헬드 카메라란 삼각대 없이 촬영자가 직접 카메라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얹고 찍는 방식으로, 화면이 자연스럽게 흔들려 현장감과 긴박감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좁은 망원동 골목, 거친 호흡 소리, 흔들리는 화면이 한꺼번에 맞물리면서 관객이 그 골목을 직접 뛰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이 몰입 구조를 두고 어떤 분들은 "불쾌할 정도로 불안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 불쾌함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기억에 오래 남는 건 하정우가 경찰서에서 자백하는 장면입니다. '내가 망치로 그냥 하면 된다'라고 평온하게 말하는 그 얼굴은, 어떤 과장된 분장도 없이 그 자체로 깊은 공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장면에서 하정우가 구현한 연기 방식을 영화 비평 용어로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과 연결 짓기도 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표정, 조명, 배경, 소품까지를 하나의 통합된 화면으로 구성하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이 장면이 무서운 이유는 자극적인 폭력이 없어서입니다. 표정 하나, 말투 하나로 끝냅니다.
'추격자'가 데뷔작임에도 이렇게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배경에는 나홍진 감독의 치밀한 시나리오 구성도 있습니다. 영화는 단 하루 남짓의 시간 안에 사건을 압축해 넣는 유니티 오브 타임(unity of time) 구조를 취합니다. 유니티 오브 타임이란 극의 사건이 매우 짧은 단일 시간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사 구조로, 관객이 이완될 틈 없이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구조 덕분에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통을 조이는 것처럼 진행됩니다.
'추격자'가 이룬 성과는 흥행 기록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합전산망 기준으로 최종 누적 관객 수는 약 507만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이는 당해 한국 영화 흥행 상위권에 해당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 이 수치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지금 다시 봐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시스템 비판이라는 진짜 주제, 그리고 한계
지영민이 경찰에게 잡힌 뒤부터가 이 영화의 진짜 시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범인이 이미 잡혔는데도 증거 불충분이라는 절차의 벽 앞에서 그는 다시 풀려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범인을 잡는 쪽으로 달려갈 줄 알았는데, 정작 진짜 이야기는 그다음부터였으니까요.
'추격자'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결국 사회 안전망의 실패입니다. 사회 안전망(social safety net)이란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와 제도가 갖춰야 할 공적 시스템 전반을 의미합니다. 영화에서 경찰은 절차를 따지고, 행정은 책임을 미루고, 그 사이 한 사람의 목숨이 꺼져갑니다. 이 구조가 2008년에 개봉한 영화임에도 지금 뉴스를 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이유일 겁니다. 제 경험상 이런 감각을 남기는 영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 '추격자'가 결국 누구를 가리키는가는 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입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엄중호가 범인을 쫓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그는 오히려 시스템과 시간에 의해 쫓기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이처럼 추격자와 도망자의 경계가 흐려지는 구조를 내러티브 반전(narrative invers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 처음 독자가 예상한 것과 정반대로 뒤집히는 서사 기법입니다. 이 반전이 단순한 충격 효과가 아니라 사회 비판의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그냥 스릴러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비판적으로 봐야 할 지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추격자'를 둘러싼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부 폭력 묘사가 서사적 필요를 넘어 과도하게 잔혹하다는 지적
- 여성 인물들이 거의 전적으로 피해자의 위치에서만 그려진다는 점
- 미진을 비롯한 여성 캐릭터의 서사적 주체성이 거의 부재하다는 비판
이 중 여성 인물 재현 문제는 저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미진이 동네 슈퍼로 뛰어 들어가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중 하나인데, 그 절박함이 서영희 배우의 연기 하나로 살아난다는 점에서 배우로서는 훌륭하지만 캐릭터 자체에 주어진 역할은 너무 제한적이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잔혹한 장면보다 그 떨리는 호흡 하나가 더 오래 머릿속에 남는다는 게,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복잡한 감정입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한국 스릴러 장르에서 하나의 기준점이 된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나홍진 감독이 이후 '황해', '곡성'으로 이어가는 작가주의 스타일의 출발점이 여기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추격자'는 단 한 번만 보고 끝내기엔 아까운 영화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 긴박함에 압도되지만, 두 번째 볼 때는 그 안에 새겨진 사회 비판의 결이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제가 경험한 가장 솔직한 반응은, 영화가 끝나고 한참 뒤에야 진짜 무서움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늦은 밤, 방 불을 켜고 보시길 권합니다. 끄고 보시면 나중에 후회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합전산망 — 누적 관객수 및 흥행 기록 https://www.kobis.or.kr
네이버 영화 — 작품 정보, 출연진, 제작진 정보 https://movie.naver.com
청룡영화상 공식 홈페이지 — 제29회(2008년) 수상 내역 http://www.blueaward.co.kr
씨네 21 아카이브 — 영화 비평 및 감독 인터뷰 자료 http://www.cine21.com
위키백과(한국어) — 영화 일반 정보 종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