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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불이 꺼지고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갔는데도 한동안 자리에서 못 일어난 영화, 몇 편이나 있으세요? 저한테는 그런 영화가 손에 꼽는데, 그 목록 맨 앞자리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올려둬요.
2018년 3월 한국 개봉 첫 주에 극장에서 봤어요. 그리고 솔직히 그 뒤로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오래 고민했어요. 뭔가 줄거리를 요약해 버리면 이 영화의 진짜 좋은 점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거든요. 이탈리아의 어느 눈부신 여름, 그 나른하고 반짝이는 공기 자체가 이 영화의 절반은 되는데, 그런 건 말로 옮기기가 참 어렵잖아요. 다 보고 나면 무슨 대단한 사건보다도, 그 여름의 햇살이랑 공기랑 어떤 표정 같은 게 오래 남아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2017년작으로, 2018년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았고 전 세계에서 4,100만 달러를 벌었어요. 흥행 규모가 큰 영화는 아닌데도 이렇게 오래 회자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죠. 이 영화가 그 한여름의 공기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아냈는지, 엔딩이 끝나고도 저를 자리에 붙들어놨던 게 뭐였는지, 저 나름의 시선으로 지금부터 하나씩 편하게 풀어볼게요.
1983년 이탈리아 여름, 줄거리와 작품 배경
영화의 배경은 1983년 이탈리아 북부의 시골 별장입니다. 열일곱 살 미국계 이탈리아 소년 엘리오 펄먼(티모시 샬라메 분)은 이곳에서 방학을 보내던 중, 고고학자 아버지 사무엘 교수(마이클 스툴바 그분)의 연구 보조로 6주간 머물게 된 스물네 살 미국인 대학원생 올리버(아미 해머 분)를 만납니다. 처음엔 서로 거리를 두지만,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누비고 강에서 수영하며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원작은 안드레 아시먼이 2007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입니다. 소설을 각색한 제임스 아이보리는 당시 88세로,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령 수상자로 기록됐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나중에 찾아보고 꽤 오래 멍했습니다. 반세기 넘게 영화를 만들어온 노장이 쓴 대사들이 왜 그렇게 군더더기가 없었는지, 그때서야 이해가 됐습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여름이 끝나가면서 로마로의 짧은 여행을 거쳐 올리버의 귀국으로 마무리됩니다. 플롯의 밀도만 놓고 보면 사건이 거의 없는 영화입니다. 실제로 처음 볼 때는 이야기가 느리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고, 저 역시 이 부분에서 솔직히 집중력이 잠깐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느린 템포 자체가 1983년 여름의 감각을 재현하는 방식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출연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 티모시 샬라메 — 엘리오 펄먼 역. 당시 22세로 섬세한 내면 연기를 선보이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 아미 해머 — 올리버 역. 자신감 넘치면서도 내면의 갈등을 감추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소화했습니다.
- 마이클 스툴바그 — 사무엘 교수 역. 후반부 독백 시퀀스로 영화 전체를 완성시킨 배우입니다.
- 아미라 카사르 — 어머니 아넬라 역. 에스더 가렐은 엘리오의 여자친구 마르지아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의 음악을 맡은 소프얀 스티븐스의 'Mystery of Love'는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특유의 서정성으로 작품 전체의 정서를 감싸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싱어송라이터란 작사·작곡·연주·보컬을 모두 직접 담당하는 뮤지션을 의미하는데, 스티븐스의 경우 이 영화를 위해 기존 스타일과는 또 다른 결의 곡들을 썼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출처: IMDb).
명장면 셋, 루카 구아다니노의 연출을 들여다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명장면은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으로 상대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나도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라는 대사는 미장센(mise-en-scène) 측면에서도 특별히 설계된 시퀀스입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프레임 안에 담기는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배경 전체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장면에서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극도로 좁히면서도 대사 이외의 시각 정보를 최소화해, 관객의 집중이 오직 두 사람의 얼굴에만 쏠리도록 설계했습니다.
두 번째로 꼽고 싶은 명장면은 아버지 사무엘 교수의 독백 시퀀스입니다. 이별로 무너진 아들 곁에 앉아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조용히 꺼내는 장면인데, 저는 이 부분에서 극장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옆자리 친구도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고, 극장 안이 이상하게 고요해졌습니다. 마이클 스툴바 그 배우가 구사한 절제된 연기는 내러티브 서브텍스트(narrative subtext)의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러티브 서브텍스트란 대사가 직접 말하지 않는 감정과 의미를 행간에 담아내는 서술 기법으로, 이 독백 시퀀스는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 도망치는 것보다 정직하다"는 영화 전체의 주제를 대사 한 줄 없이 전달해 냅니다.
세 번째는 엔딩입니다. 겨울이 온 별장에서 엘리오가 벽난로 앞에 앉아 카메라를 오래 응시하는 마지막 장면, 소프얀 스티븐스의 'Visions of Gideon'이 흐르는 그 수 분간은 제가 영화관에서 경험한 가장 긴 침묵 중 하나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클로즈업(close-up) 촬영 기법을 길게 유지합니다. 클로즈업이란 피사체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화면 가득 채우는 기법으로, 관객이 배우의 표정 변화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티모시 샬라메는 대사 한 마디 없이 그 긴 시간을 버텼고, 저는 그게 연기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연출이 모든 관객에게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사건보다 감각을 담는 데 훨씬 더 긴 시간을 쓰는 연출 방식은, 빠른 전개에 익숙한 관객에게 분명히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결국 뭔 이야기야?"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비판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 그리고 저의 총평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2018년이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다시 봤을 때 완전히 다른 작품처럼 다가왔습니다. 첫 번째 관람에서는 엘리오와 올리버의 감정선에 집중했다면, 두 번째 관람에서는 아버지 사무엘 교수의 독백이 영화 전체를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감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를 마비시키지 마라"는 한 문장에 가깝습니다.
이 주제는 퀴어 시네마(Queer Cinema)의 맥락 안에서도 읽힙니다. 퀴어 시네마란 주류 이성애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다양한 성 정체성과 관계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 장르를 의미하는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 장르 안에서도 특별히 두 인물의 정체성보다 감정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출처: 씨네 21). 영화 속 어떤 인물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언어로 규정하거나 고민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냥 감정이 흐르고, 그 감정을 마주하거나 외면하는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비판할 지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열일곱 살과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편에 걸렸고, 이 부분이 논란이 된다는 사실도 납득합니다. 또 두 사람의 나이 차이라는 설정이 작품의 로맨틱한 분위기 안에서 충분히 비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완벽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를, 이 영화는 설명이 아니라 감각으로 보여줍니다. 그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진짜 힘이라고 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원작 소설이 있나요?
A. 있습니다. 안드레 아시먼이 2007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각색을 맡은 제임스 아이보리는 이 작업으로 2018년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했으며, 당시 88세로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령 수상 기록을 세웠습니다. 원작 소설은 영화보다 엘리오의 내면 독백이 훨씬 더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으면 또 다른 감상이 생깁니다.
Q. 영화 OST 중 'Visions of Gideon'은 어느 장면에 나오나요?
A. 영화 마지막, 겨울이 온 별장에서 엘리오가 벽난로 앞에 앉아 카메라를 오래 바라보는 엔딩 시퀀스에 흐릅니다. 수프얀 스티븐스가 이 영화를 위해 작곡한 곡으로, 'Mystery of Love'와 함께 영화의 정서를 가장 잘 대표하는 트랙입니다. 저는 이 곡을 영화 밖에서 들으면 자동으로 그 마지막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강렬하게 각인됐습니다.
Q. 영화가 너무 느리다는 평이 많던데, 그래도 볼 만한가요?
A. 사건 중심의 빠른 전개를 기대하고 보면 분명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실제로 그런 반응이 나왔습니다. 다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연출은 사건이 아닌 감각과 분위기를 쌓는 방식이어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전혀 다른 경험이 됩니다. 처음 볼 때는 낮보다 저녁에, 되도록 조용한 환경에서 보시면 작품의 템포에 훨씬 쉽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Q. 두 사람의 나이 차이 논란, 어떻게 봐야 하나요?
A. 영화 속 엘리오는 열일곱 살, 올리버는 스물네 살입니다. 이 나이 차이와 그로 인한 권력 불균형 문제는 영화가 발표된 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는 비판입니다. 영화 자체가 이 지점을 충분히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지적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작품의 감동과 별개로, 이 부분은 관람 전 인지하고 들어가는 것이 솔직한 감상에 도움이 됩니다.
결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나서 며칠간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슬프다기보다, 오래된 무언가를 꺼내본 것 같은 묵직함이었습니다. 좋은 영화가 남기는 감각이 정확히 그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논리로 설명하기 전에 몸이 먼저 기억하는 그 무게감.
속도가 느리다는 비판, 나이 차이라는 설정에 대한 문제 제기, 이 두 가지는 분명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도 이 영화가 로맨스 영화의 지형을 한 자리 끌어올린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첫사랑이든 이별이든,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마주했던 어떤 순간이 기억 속에 있다면, 이 영화는 그 기억과 조용히 대화를 겁니다. 조용한 저녁에 다시 한번 꺼내볼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