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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3시간짜리 영화를 극장에서 끝까지 집중해서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2023년 여름, 개봉 첫 주말 가장 큰 상영관에서 친구와 나란히 앉아 이 영화를 봤고, 나오면서 두 사람 다 한동안 말을 잃었습니다. 전 세계 흥행 약 10억 달러, 아카데미 7개 부문 수상. 숫자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건, 객석 전체가 일순간 숨을 멈추던 그 이상한 정적이었습니다.
핵실험이 영화가 되기까지 — 맨해튼 프로젝트의 무게
'오펜하이머'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쓴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합니다. 이 책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약 25년에 걸쳐 취재한 결과물로, 단순한 위인전이 아니라 한 과학자가 역사의 한복판에 끌려들어 간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한 기록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이 평전을 각색하면서 택한 구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오펜하이머의 시점은 컬러로, 그를 정치적으로 옭아매려는 루이스 스트로스의 시점은 흑백으로 처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주도로 진행된 핵무기 개발 기밀 계획을 말합니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를 비롯한 여러 거점에서 수천 명의 과학자와 군인이 투입된 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과학 프로젝트였습니다. 영화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된 오펜하이머가 어떤 경로로 그 자리에 서게 됐는지를, 그의 케임브리지와 괴팅겐 유학 시절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립니다.
제가 영화를 보기 전에 기대했던 건 사실 '폭발 스펙터클'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영화가 전반부에서 공들이는 건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즉 원자와 전자 같은 극미세 입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물리학 이론과, 그 시대 유럽 물리학계의 지적 열기였습니다. 여기서 양자역학이란 뉴턴 역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미시 세계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 오펜하이머가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 수 있었던 학문적 기반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배경을 모르고 보면 다소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개봉: 2023년 7월 미국 / 원작: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카이 버드, 마틴 셔윈)
- 주요 출연: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스트로스), 에밀리 블런트(키티), 맷 데이먼(그로브스 장군), 플로렌스 퓨(진 태틀록)
- 수상: 아카데미 7개 부문 —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포함 (출처: IMDb)
- 흥행: 전 세계 약 10억 달러 — R등급 영화 역대 최고 수준
트리니티 핵실험 시퀀스 — 놀란 연출의 정점
트리니티(Trinity)란 1945년 7월 16일 새벽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진행된 인류 최초의 핵폭탄 실험 작전명입니다. 영화에서 이 장면이 시작되는 순간, 제가 앉아 있던 극장 객석이 정말로 조용해졌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팝콘 봉투를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사라지던 그 분위기가 지금도 선합니다.
놀란 감독이 이 장면에서 선택한 연출은 역설적입니다. 폭발의 빛이 먼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충격파(Shockwave)는 한참 뒤에야 도달합니다. 여기서 충격파란 폭발 시 발생하는 고압의 압력파로, 빛의 속도보다 훨씬 느리게 퍼지기 때문에 실제 핵실험 현장에서도 폭발 섬광 이후 수초가 지나야 소리와 충격이 느껴집니다. 이 물리적 사실을 영화적 연출로 그대로 옮겨온 덕분에, 객석에 앉아서도 그 시간차가 묘하게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하나 꼽고 싶은 명장면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이후 강당 환영 시퀀스입니다. 군중이 환호하는 그 짧은 장면에서 킬리언 머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군중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이 장면이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는데, 대사 한 마디 없이 한 인간의 내면 붕괴를 저렇게 압축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루드비히 고란손의 음악은 이 장면에서 특히 날카롭게 파고들었습니다.
촬영감독 호이트 반 호이테마는 이 영화에서 IMAX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습니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필름으로 촬영하면 색감의 깊이와 입자감이 달라지는데, 로스앨러모스 사막의 건조한 빛과 인물의 피부 질감이 유독 생생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아마 여기 있었을 겁니다. 씨네 21의 비평에서도 촬영의 물성감을 높이 평가한 바 있습니다 (출처: 씨네 21).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남긴 메시지 — 지금 이 영화가 유효한 이유
오펜하이머는 흔히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영화는 이 수식어를 영광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의 무게 앞에서 두려워하고 흔들리는 인물로 끝까지 묘사됩니다. 전기 영화(Biopic)라는 장르가 보통 주인공을 영웅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전기 영화란 실존 인물의 생애를 중심으로 구성한 극영화 장르를 말합니다. 이 작품은 그 관행에 거리를 둡니다.
영화를 나오면서 친구와 가장 오래 이야기했던 주제가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그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인데, 솔직히 저는 그 자리에서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보안 청문회(Security Hearing), 즉 정부가 개인의 충성심과 기밀 접근 권한을 심사하는 절차에서 오펜하이머가 정치적으로 무너지는 과정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스트로스의 냉정한 계산과 맞물려 영화 후반부를 완전히 다른 결로 끌고 갑니다.
한 가지 짚어둬야 할 비판도 있습니다. 영화가 미국의 시점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영화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의도적 선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일부에서 미국 중심적 시각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큰 균열이었습니다.
- 오펜하이머를 영웅도 악인도 아닌 '회색 인간'으로 그린 시각 — 작품의 핵심 태도
- 보안 청문회 시퀀스를 통해 드러나는 정치 권력과 과학자의 충돌 — 지금도 유효한 질문
- 피폭 피해국 시점의 부재 — 영화가 의도적으로 비운 자리이자, 가장 날카로운 비판 지점
그 여름 극장을 나오면서 느꼈던 묵직함은,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역사 속 어느 결정이 세상의 풍경을 영원히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경험은, 3시간을 온전히 투자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다만 진입 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기본 개요 정도는 가볍게 훑어보고 가시길 권합니다. 정보량이 밀도 있게 쌓이는 초반부를 버티고 나면, 중반 이후는 훨씬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가능한 한 큰 화면으로 보시길 권합니다. 집 스크린으로는 트리니티 시퀀스의 그 특유한 무게감이 반쯤 날아갑니다. 이미 보셨다면, 보안 청문회 장면을 다시 한번 돌려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처음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결이 보일 겁니다.
참고: 네이버 영화 — 작품 정보, 출연진, 제작진 정보 / 위키백과(한국어/영어) — 영화 일반 정보, 원작 평전, 아카데미 수상 정보 / IMDb — 외국 영화 평점 및 작품 정보 / 씨네 21 — 외국 영화 리뷰 및 비평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