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비 영화인데 좀비가 제일 무섭지 않다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2016년 개봉한 '부산행'은 누적 관객 약 1,156만 명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에 오른 작품입니다. 저는 개봉 첫 주에 극장에서 봤는데, 손에 쥔 팝콘을 한 번도 못 먹은 채 두 시간을 버텼습니다. 그 이유가 좀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좁은 열차, 좁아지는 인간
'부산행'의 무대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KTX 열차 한 칸입니다. 이 한정된 공간이라는 설정은 영화 연출 용어로 '클로즈드 스페이스 스릴러(Closed Space Thriller)'라고 부릅니다. 클로즈드 스페이스 스릴러란 탈출이 불가능한 밀폐 공간 안에 인물들을 가두어 극도의 긴장감과 심리 압박을 만들어내는 장르 기법을 말합니다. '부산행'은 이 기법을 한국형 좀비 재난과 정확하게 결합했습니다.
객차 안의 공기가 좁아질수록, 사람들의 본성도 함께 좁아집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혼자 살겠다고 문을 걸어 잠그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어느 쪽이었을까"를 계속 자문했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이 영화를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펀드매니저 석우 역의 공유, 임산부 성경 역의 정유미, 호탕한 상화 역의 마동석, 그리고 어린 수안 역의 김수안이 핵심 배역을 맡았습니다. 연상호 감독에게는 사실상 첫 실사 장편 연출작이었다는 점도 당시 화제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애니메이션 연출로 이름을 알린 감독이 이런 완성도의 실사 장편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지금 돌아봐도 적지 않게 놀랍습니다.
기억에 남는 명장면들, 그 이유
'부산행'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역시 마동석 배우가 좁은 통로에서 좀비 떼를 맨주먹으로 밀어붙이는 시퀀스입니다. 임신한 아내가 있는 객차로 가기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그 장면은, 공포 영화 안에서 가장 강렬한 인간미가 폭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액션 연출과 감정선이 동시에 폭발하는, 이른바 '카타르시스 시퀀스'로 꼽을 수 있는 장면입니다. 카타르시스 시퀀스란 극 중 쌓였던 긴장과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관객에게 강렬한 해소감을 주는 장면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가슴에 꽂힌 장면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후반부, 석우가 어린 딸이 태어나던 순간을 떠올리며 짧게 미소 짓는 회상 장면입니다. 그 짧은 표정 하나가 두 시간짜리 영화 전체의 무게를 담고 있었습니다. 공유 배우의 절제된 연기가 아니었다면 그 장면은 신파로 흘러버렸을 텐데, 딱 그 경계에서 멈추는 호흡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어린 수안이 노래를 부르며 부산역으로 들어서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이 쏟아지는 부산역으로 다가오는 그 구도는, 영화의 정서 전체를 한 컷으로 압축한 미장센(Mise-en-scène)의 교과서 같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미장센이란 한 화면 안에서 배우의 위치, 빛, 구도, 배경 등 시각적 요소를 통해 의미와 감정을 만들어내는 연출 기법입니다. 화려한 음악도, 설명적인 대사도 없이 그 한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영화의 메시지
'부산행'이 단순한 좀비 호러가 아니라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좀비가 아니라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인간입니다. 회사 임원 용석 캐릭터는 그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를 통해 영화는 위기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을 한 치의 미화 없이 묘사합니다.
이런 서사 구조를 영화 비평 용어로 '사회 풍자 장르(Social Satire Genre)'라고 부릅니다. 사회 풍자 장르란 장르적 공식을 외피로 사용하되, 그 안에 현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나 인간 심리를 비판적으로 담아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부산행'은 좀비라는 장르 외피 안에 집단 이기주의와 타자 배제의 문제를 압축하여 담아냈습니다.
석우라는 인물의 변화 역시 이 영화의 핵심 축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일과 자기 가족만 챙기던 인물이, 점점 타인을 향해 손을 뻗고 끝내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과정은 전형적인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를 따릅니다. 캐릭터 아크란 인물이 서사 안에서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여정을 의미합니다. 좀비 재난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그 변화를 가속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며 친구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는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좀비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예쁘게 포장되지 않고 그대로 화면에 담겨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산행'이 이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몇 가지 객관적인 지표가 뒷받침합니다.
- 누적 관객 약 1,156만 명 기록, 2016년 한국 영화 흥행 1위 달성(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
-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초청, 한국 장르 영화 최초의 칸 공식 초청작 중 하나로 기록
- 해외 배급 및 리메이크 논의로 이어지며 K-장르의 글로벌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으로 평가(출처: 씨네 21)
아쉬운 점도 솔직하게
좋은 영화라고 해서 비판할 지점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 역시 후반부의 감정선이 다소 신파적으로 흐른다는 비판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석우의 희생 장면 전후로 감정이 과잉 소비되는 느낌이 있었고, 일부 인물들이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기능한다는 지적도 분명 타당합니다. 착한 사람은 끝까지 착하고, 나쁜 사람은 끝까지 나쁜 구도가 현실의 복잡함을 다소 단순화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를 여전히 자주 꺼내 봅니다. 제 경험상, 볼 때마다 처음 극장에서 느꼈던 그 답답한 공기가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KTX를 탈 때마다, 가끔씩 옆자리 사람의 표정을 한 번 더 살피는 묘한 습관이 생겼습니다. 좋은 영화는 결국 현실의 어떤 풍경을 이전과 다르게 보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이 영화가 다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아직 '부산행'을 보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객차 안에서 어느 쪽 문을 열겠습니까?
참고: -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합전산망 — 누적 관객수 및 흥행 기록 https://www.kobis.or.kr
- 네이버 영화 — 작품 정보, 출연진, 제작진 정보 https://movie.naver.com
- 씨네 21 — 영화 비평 및 감독 인터뷰 자료 http://www.cine21.com
- 위키백과(한국어/영어) — 영화 일반 정보 및 칸 영화제 초청 사실 종합 참고 "> https://ko.wikipedia.org(::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