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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 관객 약 12만 명. 흥행 수치만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영화입니다. 저는 개봉 초반 작은 예술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처음 마주했는데,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날의 정적이 또렷합니다.
줄거리와 구조: 두 개의 시간이 하나의 진실을 만드는 방식
'다음 소희'는 2023년 2월 개봉한 정주리 감독의 사회 드라마입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소희 역을 신예 김시은이, 그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오유진 역을 배두나가 맡았습니다.
영화는 비선형 서사 구조를 채택합니다. 비선형 서사란 사건이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 이상의 시간축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쌓아가는 방식입니다. 1부는 소희의 시간을, 2부는 소희가 사라진 뒤 오유진이 그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을 따라갑니다. 저는 이 구조가 단순한 연출 선택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 자체라고 느꼈습니다. 한 사람의 부재가 만들어낸 공백이 2부 내내 화면에 맴돌기 때문입니다.
소희는 졸업을 앞두고 콜센터에 현장실습생으로 배치됩니다. 현장실습이란 특성화고 학생이 졸업 전 기업에서 직접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는 교육과정으로, 학교와 기업 간 산학협력의 한 형태입니다. 문제는 이 제도가 취지와 달리 저임금 단순 노동에 학생을 사실상 방치하는 구조로 운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그 현실을 과장 없이, 차분하게 쌓아 올립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 제도의 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공론화된 바 있습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현장실습 중 산업재해를 당한 학생 수는 꾸준히 보고되고 있으며, 실습 환경 개선을 위한 지침 개정이 수차례 이루어졌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그럼에도 제도 자체의 구조적 허점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솔직히 현장실습이라는 단어를 그냥 흘려듣고 있었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처음으로 묘한 부끄러움이 들었습니다. 좋은 영화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그날 새삼 선명해졌습니다.
영화 속 소희가 일하는 콜센터는 KPI(핵심성과지표)라는 수치로 직원을 평가하는 구조입니다. KPI란 개인 또는 조직의 성과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지표로, 콜센터에서는 주로 상담 건수, 계약 유지율, 해지 방어율 같은 수치로 적용됩니다. 현장실습생 신분인 소희에게도 이 기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무리한 구조 안에서, 소희는 조금씩 자기 자신을 잃어갑니다.
'다음 소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 속 핵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부: 소희의 시간 — 현장실습 배치부터 내면의 붕괴까지를 따라가는 흐름
- 2부: 오유진의 시간 — 사건 이후, 형사가 관계자들을 역추적하며 책임의 공백을 드러내는 흐름
- 두 시간의 교차: 한 사람의 부재가 만들어낸 공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구조
명장면과 메시지: 절제가 만들어낸 가장 무거운 언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초반 소희가 무용실에서 혼자 춤을 추는 시퀀스입니다. 대사 한 줄 없이 진행되는 이 장면은, 한 사람이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담아냅니다. 저는 그 장면이 펼쳐졌을 때 옆자리 관객들까지 일제히 조용해지던 그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이후 영화가 점점 어두워질수록, 그 환한 무용실의 빛이 역으로 더 무겁게 떠올랐습니다.
정주리 감독의 연출은 미장센(mise-en-scène) 측면에서 절제를 핵심 전략으로 삼습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동선, 배경 등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 요소를 총괄하는 영화 용어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격앙된 음악이나 클로즈업 남발 대신, 인물을 멀리서 바라보는 롱 쇼트와 긴 호흡의 정적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그 절제가 오히려 감정을 더 깊이 누적시킵니다.
2부에서 배두나가 연기하는 오유진은 학교, 회사, 교육청 등을 차례로 찾아가며 책임을 묻습니다. 어느 자리도 결정적인 가해자가 아닙니다. 모두 '나는 규정대로 했다'라고 말합니다. 배두나의 연기는 격앙되거나 눈물을 쏟지 않습니다. 그 절제된 표정 안에 분노를 담아두는 방식이 저는 어떤 폭발적인 연기보다 깊이 남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감정은 화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을수록 더 오래 남습니다.
영화의 제목 '다음 소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이미 사라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구조 안에 놓여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영화 속 어른들의 침묵은 악의가 아니라 무관심에서 비롯됩니다. 그 무관심의 총합이 한 청소년의 자리를 지워버린다는 것을, 영화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보여줍니다.
다만 1부와 2부 사이의 톤 차이가 다소 크다는 점, 일부 시퀀스의 호흡이 길게 느껴진다는 점은 솔직히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도 후반부의 일부 장면에서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그 어떤 흥행작보다 오래 남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합전산망 기준으로 누적 관객 약 12만 명이라는 수치는 분명 조용한 숫자이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조용함이 영화의 힘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다음 소희'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 자체가 이 영화가 의도한 효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 사회가 오래 외면해 온 자리를 한 번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이 영화는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청년 노동 관련 뉴스를 마주할 때마다 소희의 무용실 장면이 불쑥 떠오릅니다. 좋은 영화는 결국 그렇게 남는 것 같습니다.
참고: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합전산망 — 누적 관객수 및 흥행 기록 https://www.kobis.or.kr
네이버 영화 — 작품 정보, 출연진, 제작진 정보 https://movie.naver.com
씨네 21 — 영화 비평 및 정주리 감독 인터뷰 자료 http://www.cine21.com
위키백과(한국어) — 영화 일반 정보 및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 관련 자료 https://ko.wikipedia.org